티스토리 뷰

점심 때 한창 라볶이 만들 물을 끓이고 있는 도중에 전화가 울렸다. 이 지역 번호가 찍히는 게 이상해서 전화를 받았더니 어떤 아줌마다. (목소리는 아줌마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여든 되는 할머니...) 자기네 집으로 또 우리집 우편물이 왔다는 거다. 예전에도 몇 번 그래서 자기 아들이 우리 우체통에 넣었다는데 이번에도 또 받았다고 하셨다. 


기억이 난다. 한번은 우체통을 열었는데 세금신고하고 받은 확인서가 열린채로 들어있었다. 분명 잘못 갔는데 누군가 열어본 거라고 무지 기분나빠했었다. (수입이 다 드러나잖아!) 이후 또 어떤 아저씨가 찾아와서 자기 어머니 집으로 온 우편물인데 어머니가 본인 우편물인줄 아시고 여셨다면서, 저번에도 잘못 온 적이 있어 자기가 우체통에 넣었다면서 갖다 주셨었다. (은행 거래 내역서라 자세히 보면 얼마 벌고 썼는지 다 나옴 ㅠㅠ) 그런데 이번에 또 편지가 잘못 배달된 것이다. 


이 와중에 깨알같이 전하는 정보. 


우편물 사고가 나면, 못 받았다거나 집에 있었는데도 Avis de passage가 우체통에 들어있다거나 등등 모든 우체국 관련 사고들은 (심지어 우체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거나) 다음 사이트에서 항의하면 된다.


http://www.laposte.fr/Service-Consommateurs/Deposez-une-reclamation


여기서 해당 메뉴를 클릭하고 (소포인지, 편지인지, 은행 문제인지) 양식대로 기재하면 항의가 등록되었으며 며칠내로 답변을 주겠다는 메일이 온다. 



할머니 말씀은 자기 아들이 또 언제 올지 몰라서 아들에게 맡겨 가져다줄 수 없는 것. 그래서 내가 가겠다고 했다. 어짜피 그리 멀지도 않으니깐... 그런데 전화를 안 끊으시는 거다. 자기 나이가 여든인데 목소리는 그렇게 안 들리지 않느냐면서... (진짜 그랬다. 아줌마라고 생각했는데 여든이라 하셔서 깜놀) 전화하는 사람마다 어쩌구 저쩌구... 등등 5분 넘게 통화했나?


맘 나쁜 사람들의 경우 버리거나 잘못된 주소라고 우체통에 넣어버릴 수도 있는데 (만약 그렇게 하면 은행에서 온 우편물의 경우 벌금낸다. 아니 벌금이 아니라 주소찾는다는 명목으로 수수료 떼간다) 우리 우체통에 넣어주시고 전화주신게 감사해서 정원에 활짝핀 작약 몇 송이를 잘라가지고 갔다. 


오오... 대궐에 살고 계신 할머니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내가 꺾어간 작약이 무색하게 온통 장미에, 제라늄들이 피어있었다. (다행히 작약은 없었어!) 막 잡초제거를 하고 계셨다면서 말씀을 하시는데... (염색하신 머리에 피부가 너무 좋아서 절대 여든이신 것 같지 않았음) 말씀이 끝나질 않는거다. 우편물도 받았으니 가보겠다고 해도 됐지만 치매기가 있어 보여 (직업적?) 호기심이 생겨서 계속 맞장구 쳐드리며 들었다. 한 30분 넘게 들었나 했는데, 할머니 가정사를 다 알게됐다! 그 동네 사람들 얘기까지! 그 집에서 40년을 사셨다는데... 자식들 얘기까지 직업이 뭔지까지 이제 다 알아... 혼자 그 큰 집에서 사시니 외로우셨겠지. 곧 시내로 이사가신다는데 이사가는 아파트가 아들 소유로 세주는 아파트인데 할머니가 들어가신댄다. (혼자 사실 건데 방이 5개래. 우왓...) - 내가 선하게 보이는 동양 여자아이라서 이렇게 말씀 많이 하신거겠지. 아무나 붙잡고 저러시면.. 노인들 등쳐먹는 사람들도 많은데...


가까이 사는 아들, 딸, 며느리들이 자주 왔다간다는데 그래도 여든에 혼자 외로우신가보다. 넘어져서 잘 걷지 못하신다고도 했고. 그래도 여전히 운전해서 장보러 다니신다는데 아들이 같이가면 좋겠는데... 하며 말을 흐리신다. 내가 이제 간다고 해도, 가라고 하시면서 계속 말씀하시며 붙잡는다.


여긴 그렇다.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해도, 조금 거동이 불편해도, 혼자 살아야 해도 웬만하면 자기 집에서 살려고 한다. 노인들 자체도 웬만하면 남 도움 안 받으려고 한다. 완전히 정신을 놓거나, 휠체어 탈 정도까지 못 움직여야 노인 시설에 들어간다. 여튼 자기 의지로는 안 가려 한다. 어찌 여든된 그것도 약간 오락가락하는 노인을 혼자 두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 없다) 자식이 모셔야 할 이유도 없다. 노인들도 애들도 살기 바쁜데 뭘.. 하며 이해한다. 속으로 서운해 할 수는 있어도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그리우니까 말년에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 재산도 떼어주고 하는 거겠지... (재산두고 싸운 로레알 모녀도...)


늙는 게 싫다. 


번역이 더 좋아서도 있지만 심리학자 일을 그만둔 것도 이런 이유다. 남편과 결혼해 프랑스에서 살 것이 확실해지면서 세부전공을 노인심리로 바꾸었고, 이후 노인병원과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너무 힘들었다. 일이니까 어느정도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멘토를 둔다. 그게 아니면 적어도 동료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 난 죽음보다 늙음을 마주하는 것이 더 어려웠었다.


어쨌거나 할머니 집을 다녀온 뒤로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비울겸 쓰는 글이다. 어째 날씨까지 천둥치고 우울하다.

반응형

'Life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부 휴가  (2) 2012.09.03
근황, 그간의 이야기  (12) 2012.08.03
그간의 근황  (6) 2012.05.31
신혼은 언제까지일까? 신혼의 기준  (9) 2012.03.01
블로그로 귀환, 변명  (4) 2012.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