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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경과 아주 가까운 벨기에 땅에 오르발 수도원이 있다. 맥주 애호가라면 이름을 들어봤으리라. 트라피스트 맥주를 만드는 바로 그 수도원이다. (송어가 반지를 물고 있는 로고가 그려진 바로 그 맥주다)


오르발 수도원 모습. 깜깜해진 저녁에 도착해 새벽3시에 나왔으니 난 전혀 수도원을 보지 못하고 왔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남편이 수도원에서 2박을 하자고 했다. 예전에 다녀왔던 곳인데 다시 가고 싶다면서 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템플스테이 정도 될까? 수도원에서 숙박업을 전문으로 하는 건 아니고 도미토리나 스튜디오(우리나리로 치면 원룸)들이 몇 개 있어서 수도원 생활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이나 쉬러오는 이들에게 빌려준다. 우리도 그곳 수녀님과 연락하여 부엌 시설이 있는 스튜디오를 예약했다. 금요일 저녁에 도착해서 일요일 아침 미사를 드리고 떠나는 것으로 계획하고서. 난 정말 굉장히 기대했었다. 수도원에서 자는 것도 처음이지만 오르발 수도원에 대한 다큐를 번역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깊은 곳을 가게 된다는 데에, 수사님들과 식사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릴 기대에 가슴이 마구 부풀었었다.


수도원 저녁식사 시간이 6시 반인가 7시까지인가 그래서 첫날 저녁은 우리끼리 먹기로 했다. 남편이 퇴근하고 바로 출발해 가면 7시 도착이어서 라클레트를 먹을 수 있게 준비했다. 난 모든 짐을 싸놓고 기다렸고 퇴근해오자마자 트렁크에 짐을 싣고 달렸다. 다른 건 필요없지만 개인 시트나 침낭을 꼭 가져가야한다. (대여도 가능함)


7시에 도착해서 방 열쇠를 받고 가보니 안 그래도 밤이라 깜깜한데 불도 다 꺼져있고 너무 조용해서 우리밖에 없는 줄 알았다. (겨울날 저녁에 도착할 경우 손전등 필수!) 어쨌든 수도원이기 때문에 침묵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용한 분위기를 지켜줘야 한다. 인터넷이나 티비도 당근 없으므로 조용히 자연을 벗삼아 묵상하고 지내다 돌아올 줄 알았다. 그리고 그걸 기대했었다.


수도원 시설은 기대를 마시라. 대신 전문 숙박업소가 아니므로 저렴하다.


입구


우리가 예약한 스튜디오 12


화장실, 욕실과 주방으로 가는 복도 (스튜디오를 빌리면 주방시설이 갖춰져 있지만 화장실, 욕실은 공동사용이다)


샤워실


화장실 (남녀 공용이다)


공동주방 (이용하려면 따로 빌려야 함)


복도끝 나무문으로 잠궈둔 곳은 여름에 그룹을 받을 경우 열어놓고 씀



우리가 빌린 스튜디오다.

더블베드 이런 건 없다. 도미토리든 스튜디오든 다 1인용 침대


베개와 담요는 있으므로 개인 시트를 가져가서 씌워야 한다. 아니면 간단하게 침낭을 가져가거나


주방시설. 냉장고도 있다


벌레잡는 파란 램프까지 있었다. ㅋㅋ



라클레트. 치즈를 녹여서 감자와 각종 햄들과 함께 먹는 요리다.



수도원 체험을 원하는 이들도 있을 테니 소개해야겠단 생각에 열심히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간 (준비랄 것도 없이 감자만 삶아갔다) 라클레트를 꺼내 조용히 저녁을 먹었다. 다 먹고 9시가 넘어 조용히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데 옆이 굉장히 시끄러웠다. 그냥 말하는 게 아니라 마구 소리지르고 이상하게 웃고 그래서... 젊은 친구들이 온 건가 하다가 들어보니 장애인들 같기도 했다. 침묵이란 수도원 분위기에 반하긴 하지만 아주 늦은 시간도 아니고 그러려니 했다. 한 시간쯤 그렇게 떠들다가 잠시 조용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 아, 뭐 작게 들리면 뭐라 안 하겠는데 예전에 수련회 갔을 때 아침에 일어나라고 트는 기상용 음악처럼 크게 들리길래 이건 또 뭔가 했다. 11시면 잘 시간인데... 우리도 자려고 누웠는데... 다른 데면 몰라도 여긴 수도원인데 정말 뭐지 싶더라.


문을 열고 나가보았다.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입은 청년? 어른들이 (안경을 안 써서 잘 안 보이는데 키들이 엄청 컸다. 독일애들인가..ㅋㅋ) 음료수인지 술인지 잔뜩 들고 지나가길래 남편이 음악튼거 당신네들이냐 물었고 그렇다길래 좀 낮춰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왔는데 뭐라 그랬다고 일부러 그런건지 아님 상관없이 원래 나던 소리인지 쾅쾅쾅 뛰어다니는데... 남편 얼굴 구겨지고... 이제 들어왔나보다 좀 정리하고 나면 조용해지겠지 싶어서 참았다. 이걸 예상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원래 여행가면 항상 챙기는 귀마개를 꺼내 꽂았고... 그래도 소음이 심했지만 너무 피곤했던 나는 잠을 자려고 누웠다. 난 졸다 깨다 했지만 남편은 잠을 자지 못했다. 평소에도 소음에 민감했던 남편이고 이 소음은 층간소음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음악소리, 발자국소리, 의자인지 테이블인지 끄는 소리... 대체 뭘 하길래 새벽 1시가 넘어서도 의자끄는 소리가 나는 걸까...


처음에는 침대를 이리저리 붙이느라 소리가 나는 줄 알았다. 1시까지는 그래 좀 이해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2시가 되도 그치질 않고 음악소리는 점점 커지고 가라오케를 하는 건지 마이크 잡고 노래부르는 소리에...

템플스테이 왔는데 알고보니 옆방이 노래방? 뭐 이런 기분이었다. 2시가 넘어 군무를 하며 합창을 하는지 여러명이 집단으로 뛰는 소리에 소음에 관대했던 나도 벌떡 일어났고, 불을 켜고서 남편과 의논했다.


2박하기로 했지만 우리 내일 집에 가자.

넌 수도원이 처음이니 내일 구경은 해야지.


가서 조용히 해달라고 말할까?

부탁한다고 조용히 할 사람들이면 새벽 2시가 넘었는데 벌써 조용히 했을 거야.


캠핑장에서도 12시가 넘으면 남들 잘 시간이니까 모든 활동을 중단하는데 여긴 수도원이잖아.

수도원에 온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걸 보면 저 사람들은 오늘 완전히 놀 작정한 거야.


3시가 되면 그칠까? 4시? 5시?

몇 시에 끝날지 모르지만 그친다고 쳐.

그때부터 잠들기 시작해서 몇 시간 눈붙인다 해도 아침에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아.

구경할 기분도 아니고 집에 가고 싶겠지.


우리 지금 집에 갈까? 짐 싸다가 소리 그치면? 그럼 짐 다시 풀지 뭐.


짐을 쌌다. 뭐 어지른 것도 없고 금방 다 쌌는데... 3시가 됐는데 음악소리, 노래는 여전하다.

사람이 없을 것 같아 편지를 썼다. 이래저래해서 우리 떠나기로 했다고.


짐들고 나오는데 길에서 담배피우던 몇 명의 스카우트들이 인사를 한다. 남편은 인사했지만 난 그냥 씹었다. 니들도 양심이 있으면 새벽에 짐싸서 나오는 거 보고 미안해야 하지 않니?


문틈으로 열쇠와 편지를 넣어놓고 새벽 3시에 출발해서 집에 도착하니 거의 5시. 집이 이렇게 좋구나.. 그러면서 아침까지 잤다.


다음날 한 수사님에게서 메일이 왔다. 미안하다고. 원래 알던 이들이 아니라 그날 처음 받은 스카우트들이었단다.  수도원 정신에 어긋나는 사람들이었다면서 앞으로는 주의해야할 것 같다고도 하셨다.


우리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렇게 나오게 된 상황은 유감스럽다고. 지난 번과 달라 좀 실망스러웠다고 답장을 썼다. (그때까지 남편은 그래도 다시 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었다.)


그 이후 예약할 때 메일을 주고받았던 수녀님에게서 메일이 왔다. 정말 미안하다고. 그 스카우트들과 얘기가 좀 오간 듯했다. (남편은 걔네들 야단맞은 것 같다면서 좋아했다.) 그래서 내년에 다시 방문하겠다고 답장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틀어져버렸지만 내년 봄에 다시 갈 생각이다. 그런 몰상식한 사람들이 다시 없기를 바라며...


숙박을 원한다면 다음 사이트를 방문할 것. http://www.orval.be 

Guest house나 Chalet를 예약하면 되고 예약은 이메일을 보내면 된다. (hotellerie@orval.be)


규정상 최소한 이틀은 머물러야 한다. 숙박업소가 아니기 때문에 저렴하게 하루 머물 생각하는 거라면 피할 것. 꼭 종교적인 목적이 아니어도 괜찮다. 대신 수도원 분위기를 지킬 것. 숙소가 시설이 좋은 건 아니기 때문에 좀 더 조심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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